상편에서 미국이라는 문명에서 역사적으로 반복되어온 여러 종류의 순환주기들이 모두 2020년대에 ‘위기’ 단계에서 중첩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패권국 미국이 심각한 붕괴 위기를 직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어떻게 전 세계적인 심각한 문제가 되며, 하나님 나라에도 큰 도전이 되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서 하편에서는 나라나 문명이 일단 ‘쇠퇴’ 단계에 들어서게 되면 이렇게 중첩되는 여러 가지 위기를 왜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붕괴’하는지에 대해 조금 더 심층 고찰을 해보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써 교회인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가를 큰 틀에서 제안하고자 합니다.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역사적으로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가 번영하고, 억압되고 부패한 사회는 몰락한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일반 명제입니다. 왜 그럴까요?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잠언 14:34)


위 잠언서 말씀도 한 나라의 번영은 일반적으로 그 나라의 도덕성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명료하고 직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사기서와 열왕기서는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가 서로 극명하게 대조되는 사사 시대와 왕조 시대를 지나면서 어떻게 상반되는 국가 체제와 사회적 특성을 가졌는지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후 교만에 빠진 사회는 점차 무정부 상태에 빠져 서로가 서로에 대한 마녀사냥을 이어가며 함께 비참해졌고, 이후에는 주변 민족에 대한 열등감과 자기연민에 빠져서 이제는 반대로 스스로 전제주의에 빠져들었고 독재자의 횡포 속에 백성은 피폐해졌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두 시대 모두 처음에는 비교적 건강하게 출발했고 심지어 번영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하나님을 버리기 시작하면서 당시의 시대적 특성이나 국가 체제와 상관없이 나라 안의 공의는 빠르게 상실되었고, 사회 모든 영역은 점점 폭력과 불의, 피폐와 비극으로 가득하게 되어 그야말로 끔찍하게도 처참한 결말을 맞이하였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전에 모세를 통해 어떻게 “사망과 화가 아니라, 생명과 복을 선택해야”(신명기 30:15-20)하는지를 수도 없이 반복해서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된 것은 정말로 커다란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이와같이 도덕성의 상실은 사회의 양극화와 몰락을 가져오는데요.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아모스 7:7-8)


이런 나라와 문명의 몰락이 어떻게 가능한지 로이 윌리엄스(Roy H. Williams)와 마이클 드루(Michael R. Drew)의 또 다른 사회학적 주기에 관한 연구인 Pendulum(진자, 振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먼저 Pendulum의 핵심 아이디어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상편에서 말씀드렸던 사회학적 주기 80년 안에서 사회가 다시 40년간의 좌 성향 ‘집단주의(We)’ 주기와 이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40년간의 우 성향 ‘개인주의(Me)’ 주기를 오갑니다. 이는 마치 좌우로 진자운동을 하는 커다란 시계추와도 같은 모습인데요. 좌 극단으로 갈수록 사회 안에 좌 편향 집단주의 성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우 극단으로 갈 때는 우 편향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지면서, 좌편 상향, 좌편 하향, 우편 상향, 우편 하향의 각 단계가 20년을 단위로 서로 다른 독특한 사회적 특성들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강하게 시사하는 바는 사회는 이 순환주기의 중심축 주변을 작은 폭으로 오가면서 사회학적 주기 운동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중앙의 무게중심에서 크게 벗어나 좌우 극단으로 요동치면서 커다란 진폭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전자는 사회가 건강하고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발전을 할 때이고, 후자는 사회 안에 동요가 심하고 자원과 에너지가 허비되어서 사회가 오히려 퇴보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고 여러 문화와 개별적 다양성을 초월하는 진리가 사회의 무게중심이 되면,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도덕성과 다수가 공유하는 공통의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사회는 건강하게 지속해서 발전합니다. 이는 진리라는 무게중심으로 인해 사회의 좌우 편향 폭이 작아짐으로 말미암아 다양성과 배려, 자유와 공익이 함께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로 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점을 쉽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진리를 배척하여서 무게중심을 잃은 사회는 가치 판단의 기준인 도덕성을 잃어버려서, 결과적으로 승자를 숭상하고 아무런 가치관을 방만하게 추구하거나 (이기주의와 방종, 그리고 허풍과 공허감에 빠지는 극우 개인주의 시대입니다), 아니면 반대로 자기의에 빠져서 다른이에게 특정 가치관을 강요하면서 (희생을 책임이라고 하고, 획일성으로 억압하는 극좌 집단주의 시대입니다) 사회는 각종 문제로 병약해집니다. 따라서, 진리를 상실한 상태에서는 사회는 커다란 진폭으로 좌우 양극을 오가며 가치관의 양극화가 나타나서 극단적으로 분열되기 때문에, 결국 어떠한 문제도 함께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국가적 재난에 이르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같은 사회학적 주기라고 할지라도 문명의 쇠퇴 말기로 갈수록 더욱더 커다란 진폭을 보이는데, 이는 진리와 도덕성이 상실된 사회가 양극화되어서 위기에 취약해진 상태입니다. 

양극으로 요동하며 커다란 진폭을 보이는 진자는 오늘날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있는 미국의 쇠퇴 말기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머지 서구권과 심지어는 한국도 이에 동조화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진리를 상실한 사회는 마치 하나님의 다림줄을 버리고, 대신 흔들리는 진자를 다림줄로 삼아 담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위에 아모스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진리를 버린 나라는 결국 무너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 법칙입니다.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여

그런데 혹시 문명 몰락의 마지막 징조라는 것이 있을까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유다서 1:7)


존 글럽 경(Sir John Glubb)의 4천 년 역사를 통한 제국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제국 몰락의 징조로 ‘외국인의 난입’, ‘통합 관습의 붕괴’, ‘과도한 복지’, ‘물질주의 성행’, ‘도덕성 쇠퇴’, ‘종교의 약화’ 등을 꼽고 있는데요. 이는 모두 미국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문명 붕괴 직전에 나타나는 최후의 징조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집어서 말하고 있는 학자가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커밀 팔리아(Camille Paglia)라고 하는 인류학자는 본인이 페미니스트 레즈비언이자 트랜스젠더임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서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요. “문명의 쇠퇴기에 동성연애와 가학피학성 성행위가 갑자기 만연하기 시작합니다. 붕괴 직전이죠… 성전환주의(transgenderism)에 대한 대중의 용인이 빠르게 퍼져갑니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 [모든 문명의 몰락 때마다] 계속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 나타났던 현상인데, 이게 바로 지금 미국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반면, [몰락하는] 문명의 외곽에서는 여전히 영웅적인 남자다움의 힘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팔리아가 인류 역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문명 몰락의 최후의 징조는 장기간 전쟁이나 지나친 양적 완화로 인한 국가 재정의 불건전성도 아니고, 기득권층의 탐욕으로 인한 높은 실업률이나 하이퍼 인플레이션도 아니고, 개인의 정체성이나 심지어 국가 정체성 상실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문명 몰락의 징조인 것은 맞습니다만),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성전환 주의에 대한 대중의 용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미국과 다른 서양 국가들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바입니다. 팔리아가 지적한 이것은 바로 몰락하는 문명사회에서 극단적으로 무너져버린 도덕성의 심층부의 단면입니다. 

위 유다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소돔과 고모라는 그러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문명의 원형이 되었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쇠퇴하는 문명은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버리는데요.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창세기 11:4, 7-8)


스코틀랜드 출신 역사학의 거장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다음과 같이 나라와 문명의 쇠락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라나 문명이 인간의 성장 곡선과 같이 서서히 성장해서 정점을 찍은 후 완만한 내리막 곡선을 타고 쇠퇴한다는 이론을 떠올립니다. 완전히 틀린 생각이죠… 현실적으로 나라와 문명은 매우 갑자기 떠올라서 안정기를 지난 후 벼랑 끝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소련의 예를 생각해보세요… 나라와 문명은 ‘복잡계(complex system)’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균형 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항상 혼란의 주변을 맴돌며 순응하는 중이죠. 이러한 ‘복잡계’는 특정 상황에서 매우 작은 동요에도 붕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국제 질서는] ‘단극세계’에서 [재난적 국면을 거치지 않고] 그다음 단계로 부드럽고 순조롭게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상대적 하락세로 가고 있다 해도 특정 문제들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나라나 문명의 몰락은] 정말 깎아지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퍼거슨의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덩치가 클수록, 그리고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갑자기, 그리고 더 크게 떨어진다는 말이고, 패권국의 몰락은 국제 질서의 격변과 세계적 재앙을 야기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퍼거슨이 말하는 “특정 상황”에서 매우 “작은 동요”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쇠퇴 말기’에 처한 문명이 여러 종류의 위기 단계가 중첩한 상황에서 격을 수 있는 경제 위기, 적국의 공격, 국가 기반시설의 마비, 지속적 혹은 대규모 자연재해나 역병 등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면 그것이 어렵고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결국 극복하고야 말겠지만, 쇠퇴기에 들어간 사회가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이미 ‘지성’ 단계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도덕성으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정치, 경제, 교육, 가정, 언론, 스포츠 연예계 등–상당히 깊은 문제들이 있고 사회 다방면에 관료주의와 심각한 부패가 만연해 있어서 어떠한 국가적 문제들이 발생하면 이를 해결할 만한 사회적, 정치적 합의를 도출해내지 못하고, 다각적 분열과 뿌리 깊은 부패로 인해 위기에 적시에 대응하지 못하여서 결국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최근 상영된 “ (Don’t Look Up)”이라는 영화가 이것을 희극적으로 풍자해서 잘 묘사했더군요. 이와 사뭇 대조적으로, 1998년 상영작 “아마겟돈(Armageddon)”은 정확히 똑같은 위험에 빠진 인류가 어떻게 연합해서 이를 영웅적으로 극복해내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 영화 모두 가상 시나리오이긴 합니다만, 24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이 세상의, 특히 미국의 시대적 상황과 사회적 분위기가 얼마나 대조적으로 달랐는지 잘 반영하고 있어서 주목해볼 가치가 있습니다.

위 창세기 구절에 있는 바벨탑 사건은 바로 이러한 복잡계의 갑작스러운 몰락의 원형입니다. 아마도 인류 최초의 거대 복잡계이자 유일했던 세계 단일 정부였던 바벨 제국과 그 총역량의 집결체였을 바벨탑… 당대 인류 최고의 복잡계는 언어 혼란이라는 동요에 대하여 적시에 대처하지 못하고 어느 날 붕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상편에서부터 이어서 살펴보았듯이, 지난 6천 년 역사에 기반을 둔 순환주기적 고찰과 기타 고찰을 통해 볼 때 미국은 이제 급속도로 몰락하는 문명이 되어버렸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할까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3-16)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Civilization–The West and the Rest (번역서: 시빌라이제이션 – 서양과 나머지 세계)에서 서양 문명이 어떻게 지난 500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가능했느냐는 질문에 “6가지 비장의 무기 (6 Killer Apps)”라고 하는 6가지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답합니다. 다른 문명이나 나라에서도 모방해서 사용할 수 있는 이 6가지 적용 원칙은 경쟁(competition), 과학(science), 재산권(property rights), 의학(medicine), 소비 사회(consumer society), 그리고 마지막으로 직업윤리(work ethic)데요. 그중 첫 번째 5가지는 다른 나라나 문명에서도 나름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 모두 대략 200년 정도는 상당히 번영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지속하지 못하고 쇠락했다는 점입니다. 그 비밀은 바로 직업윤리라고 하는 6번째 비장의 무기에 있는데, 이것이 앞의 5가지 무기들을 유지해주는 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고, 직업윤리는 다름이 아닌 개신교의 도덕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다시 말해서, 서양 문명은 바로 1517년에 일어난 종교개혁을 기반으로 강하게 일어나서 세계를 주도해나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한편, 종교개혁은–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도외시하고–교회의 내부 개혁에 집중하였죠.)

그래서, 교회가 건강하면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고, 사회 영역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요. 이는 퍼거슨의 연구를 통해서도 입증된 바와 같이, 교회는 도덕성의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주요 종교로 성장한 나라에서 교회의 도덕성은 그 나라 전체의 도덕성의 선행 지표가 됩니다. 쉽게 말해서, 만약 한 나라의 도덕성이 무너지고 있다면 이는 교회의 도덕성이 이미 무너진 결과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교회에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면 나라가 부흥합니다. (물론 세상에 제시되는 도덕성의 기준과 거룩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교회에 제시되는 도덕성의 기준은 같지 않습니다. 당연히 교회에 더 높은 기준이 적용됩니다.)

위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을 보이면, (이 글의 핵심어 하나를 사용하자면, 우리가 높은 ‘도덕성’을 보이면, 혹은 성경의 주제어 하나를 빌어 표현하자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좋으신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구나!” 하면서 ‘소망’을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거죠. 시대가 어두울수록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소망’인데요. 다수의 대중에게 특정 소수의 사람이 ‘소망’의 통로, 심지어는 ‘소망’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대중은 언제나 리더십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행하면 세상이 이를 통해 ‘소망’을 보고, 이 ‘소망’을 본 세상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행하신 바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이 제일이라고 했나 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버려서 도덕성을 상실하고, 이제 하나님의 다림줄을 대신하여 흔들리는 진자를 다림줄로 삼았기 때문에 무너지고 있는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인 교회가 먼저 대각성(Great Awakening)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 외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설령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사명은 전부 차치해버리고 그저 당장 우리와 우리 자손이 평화로운 세상에 사는 것만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특별히 미국 교회의 대각성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명확해집니다! (이는 당연히 한국과 한국 교회에도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세계 각국 교회의 대각성을 위해서, 특히 미국 교회의 대각성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의 대각성으로 시작해서 미국과 열방에서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어느] 때에[라도]…

이즈음 되어서 어느 분이 ‘아니, 여태껏 세계 상황뿐만 아니라 교회의 상황도 그렇게 암울하다고만 실컷 말해놓고 바뀐 것은 전혀 없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뭔가 될 것처럼 말하면 모순이 아니냐?’라고 하신다면 일리가 있으신 말씀입니다.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예레미야 18:7-8)


하지만, 이럴 때 다음의 F. 스캇 필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류 지성은 상반되는 두 가지 개념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여전히 역할을 수행하는 능력으로 검증된다.” 우리는 희망이 전혀 안 보이는 상황에서 희망적일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할 수 있어야지 됩니다. 특히 리더라면 더욱 그렇게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도 “회의적이거나 냉소적인 이들은 세상의 문제를 절대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시야는 명백한 현실에 가려져 있죠. 우리는 한 번도 있지 않았던 것들을 꿈꾸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죠.

여기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순환주기론(cycle theory)은 결정론적(deterministic)이지 않고 개연론적(probabilistic)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환주기론은 어떤 비범한 인물의 등장이나 재앙적 자연재해나 하나님의 어떠한 직접적인 개입 등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에 대한 힌트를 이미 주신 바가 있는데 바로 위의 예레미야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느 특정 민족이 어느 특정한 때에 회개하면…”이 아니라, “어느 민족이나 국가이든지… 어느 때에든지” 회개하면 그들에게 예정된 재앙을 돌이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갖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먼저 미국 교회와 세계 모든 교회의 대각성을 위해서,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열방의 부흥으로 이어지도록. 그래서, 결국 이 시대 안에 모든 미전도 종족들과 전략적 선교지에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한 20만 명의 새로운 젊은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 땅끝까지 나아가는 선교 운동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패권국 미국이 무너지면 앞으로 3차 세계 대전은 물론이고, 세계는 수 세기 동안 ‘다극세계’ 시대에 머물게 되고,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는 크게 후퇴하게 될 것이 확실시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교회는 이 시대 안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기회 조차 잃게 될 겁니다. 

이것을 포괄적으로 표현하자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두 번째 종교개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근원적 변화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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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근원적 변화는 교회의 대각성으로만 끝날 수 없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 9:7)


전 세계 교회는 지난 1990년대를 지나며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가장 놀라운 성장을 보였는데, 이는 성장률, 구원받은 이들의 수, 그리고 이것을 단 10년이라는 최단기간에 이루었다는 면에서 모두 그렇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이후에 계속된 선교의 노력이 그대로 지속될 경우 마침내 2030년대 말까지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상태에까지 이르렀었죠! 팬데믹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위 이사야서에 예언된 바와 같이, 그리고 위 그래프에서 지난 2천 년 교회 성장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는 계속해서 무궁히 확장되어 갈 것이고,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지상대명령도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할 질문 한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세계복음화를 위한 충분한 자원과 이것이 우리 시대 안에 실현 가능한 기회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는데,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드디어 우리 시대 안에 이루어내고 마지막 날에 주님 보좌 앞에 설 것인가? 아니면, 미래의 다른 어느 세대가 이 과업을 이루도록 미완성 상태로 남겨둘 것인가? 당연히 우리가 이 시대에 해야지 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된 현실 점검도 해보겠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자원을 가지고 이루고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이루지 못한 지상대명령의 완성을 정말로 우리 시대에 이루기 원한다면 다음 사실을 결코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Christianity에 의하면, 현재 미국 교회는 전 세계 기독교 인구의 10%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있고,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의 재정 53%를,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술력 70%를,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의 훈련 자원 75%를, 그리고 선교의 혁신과 지도력 거의 모두 다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상대명령 성취를 위해서도 다시 한번 미국과 미국 교회의 중추적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한마디로, 미국 교회를 빼놓고 세계 선교를 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에 더해서, 상편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세계 선교를 수행하기 위해 ‘단극세계’ 시대, 즉 팍스 아메리카나를 통한 국제 질서의 안정기가 지속되어여만 합니다. 따라서, 미국은 하나님 나라를 섬기기 위해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로서 존속해야 할 역사적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인 우리도 이것을 위해 기도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떠한 국제적,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 문제를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에 최상위 가치를 둘 때만 가질 수 있는 관점입니다! (마태복음 6:33)

아울러, 저는 이 근원적 변화가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작용 운동(reactional movement)’이 아니라 총체적 진리에 기반을 둔 ‘전략적 주도(strategic initiative)’가 되길 기도합니다. ‘반작용 운동’ 대비 ‘전략적 주도’에 관해서는 다음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이번 글(상하편)은 저의 오랜 친구이자 멘토이신 프레드 마컷(Fred Markert) 선교사님으로부터 배운 바에 기반을 두고 쓴 것이고, 곧 프레드 선교사님이 출판하실 책에서 더 방대한 정보와 깊은 통찰력을 찾아보실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곳을 클릭하시면 그 책에 관한 정보를 보실 수 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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